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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의 역사 ] 권홍우 - 부에 대한 인간의 열정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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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icola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5-12-17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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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이사,대전익스프레스,삼손익스프레스,대전사무실이사,대전포장이사,제주도이사,1660-2404 부의 역사 ] 권홍우· 대항해 시대에서 석유 전쟁까지... 부에 대한 인간의 열정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 인간의 의지가 '광기와 탐욕'으로 변하고, 탐욕이 모여 제도로 굳어지는 과정...재미있고 자세하게 풀어 낸 '부의 역사', 아니 '경제사'. ​Yes24 바로가기 ↓bitl.bz​1장은 주로 종교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으려는 갈망이 경제에는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다뤘다.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 박해가 세계 경제 패권의 흐름에 연쇄적인 파장을 낳았다는 점을 조명했다. 2장에서는 가까스로 얻어낸 자유가 탐욕, 투기와 어우러져 산업혁명의 꽃을 피우는 과정을 담았다. 3장에서는 겉으로는 자유시장 경제로 포장되어 있지만 보이지 않는 억압과 독점구조를 주로 국제 금융시스템과 자원 전쟁이라는 시각에서 추적했다. - 머리말 중 7p​​​I 장 황금 제국과 유대인1. 역사의 갈림길, 1492년​1492년, 어떤 일이 일어났나​세기말인 1999년, 새로운 천년을 앞두고 ;등 세계 유수 언론이 선정한 '지난 1000년 동안 가장 큰 사건'으로 꼽힌 것이 바로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다. 경제사에 있어서 1492년은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미국이 콜럼버스로 인해 시작됐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세계 질서를 탄생시킨 씨앗이 1492년에 심어졌다고 할 수 있다. 1492년에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말고도 두 가지 사건이 더 숨어 있다. 바로 '레콘키스타 Reconquista의 완성'과 '유대인 추방령의 선포'이다. 18p​'레콘키스타'는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재정복'이지만, 8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지금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지역인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 왕국을 몰아낸 기독교 세력의 국토회복운동을 말한다. 사막에서 발흥한 이슬람의 위세가 하늘을 찌른 반면, 유럽은 로마제국 멸망 뒤 사분오열된 상태였던 8세기 초반의 어려운 상황에서 이베리아 반도 지역의 기독교 왕국들이 내세운 목표가 레콘키스타다. 그 기치 아래 기독교 왕국들은 조금씩 국토를 회복해 나갔다. 레콘키스타의 완성은 에스파냐 지역 내 기독교 왕국들의 군사적 승리, 종교적 재정복의 완성에 머물지 않고 서구가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신호탄이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도 같은 맥락이다. 18p​또 다른 사건은 '유대인 추방령의 선포'이다. '알람브라 칙령'이라고 불리는 유대인 추방령으로 유대인뿐 아니라 이슬람 무어족 수십만 명이 에스파냐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네덜란드의 독립과 영국의 발흥, 15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의 삼국무역, 미국의 성장 등이 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이라는 키워드로 설명될 수 있다. 18p​1월 레콘키스타의 완성과 3월 알람브라 칙령의 선포, 10월 신대륙의 발견으로 숨 가쁘게 이어진 1492년의 사건들은 시기적, 지리적 공통점과는 또 다른 세 가지 영역에서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종교 이데올로기와 돈 그리고 사람이다. 경제사의 흐름도 여기서부터 서구 중심으로 갈렸다. 18p​세기의 결혼으로 781년 만에 이룬 숙원​예언자 무함마드(570-632)가 창시한 이슬람교가 들불처럼 번지며 유럽 대륙까지 삼키려 들었을 때 서구 문명을 지켜낸 사람이 카를루스 대제이다. 카룰루스 가문의 승리로 유럽 문명은 이슬람의 위협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에스파냐 지역은 오랫동안 이슬람교도들이 세운 옴미아드 왕조의 코르도바 왕국에게 지배받았다. 코르도바 왕국이 세비야와 말라가, 사라고사, 그라나다로 분열된 뒤에도 이슬람의 지배는 이어졌다. 그런 에스파냐에 살던 기독교 귀족들이 중심이 돼 이슬람에게 빼앗긴 국토를 회복하자는 운동이 레콘키스타다. 20p​13세기 말부터 기독교도들은 에스파냐 땅의 대부분을 되찾았으나 마지막 남은 그라나다 왕국은 200년 이상을 더 버티며 에스파냐 기독교도들의 애를 태웠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 지역에서는 마지막 남은 이슬람 세력인 그라나다 왕국과의 경쟁 말고도 여러 기독교 왕국들이 서로 반목하며 경쟁하고 있었다... 서로의 주권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 통일 카스티야 왕국으로 거듭난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군대까지 통합, 막강해진 무력으로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를 1492년 1월 2일 함락시켰다. 711년 이슬람교도들에게 이베리아 반도를 내준 지 781년만에 그들을 몰아냈다는 환희 속에 에스파냐는 일약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무혈 입성한 공동 국왕은 아름다운 궁전과 정원, 거대한 도서관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에스파냐의 레콘키스타 완성과 통일, 강대국으로의 도약이라는 에너지는 결국 바다를 향한 모험을 낳고 세계 역사강 가장 큰 사건이라는 신대륙 발견으로 이어졌다. 24p​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시기적으로 1월 레콘키스타의 완성과 10월 신대륙 발견 사이인 3월 31일 선포된 알람브라 칙령이다. 자유로운 이동이나 재산의 소유 등 개인의 권리에 대한 보장이 국가나 집단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는 시각으로 봤을 때 경제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할 수도 있는 유대인에 대한 집단 추방령이 내려진 것이다. 24p​알람브라 칙령의 비극​당시 에스파냐가 유대인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에스파냐에 유대인이 몰렸던 이유는 방황하던 유대인들에게 당시의 랍비들이 '새로운 약속을 기약할 수 있는 땅'으로 에스파냐를 제시했고, 유대인들에 대한 이슬람 왕국의 관용에 있다. 레콘키스타로 이베리아 반도 내에 영토가 점점 줄어들던 세비아 왕국이 1082년 북아프라카에서 불러들인 광신적 교파가 집권한 뒤 유대인을 압박하자 상당수 유대인들은 이슬람 왕국을 탈출해 기독교 왕국으로 피신했다. 서구에서는 잊혀졌으나 이슬람 국가들이 아라비아어로 번역해 간직해오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의학과 철학 서적들이 대거 히브리어와 라틴어로 다시 번역된 것도 이 시기다. 아라비아 수학과 기하학도 전파됐다. 이런 이유로 에스파냐의 유대인들은 기독교 왕국에서도 전성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에스파냐의 유대인들은 황금기를 보내며 '세파르딤 Sephardim'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28p​갑작스런 추방령은 충격 그 자체였다. 에스파냐의 공동 국왕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여왕이 유대인 추방의 명분으로 세운 것은 종교였다.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음에도 '사악한 신앙과 음탕한 관습, 율법'을 고집하며 성스러운 기독교에 해악과 오욕을 미쳤다는 것이다. 독실한 신앙을 지녔던 공동 국왕이 내린 칙령의 이면에는 경제적인 계산도 깔려 있었다. 알람브라 칙령의 경제적 속셈은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영주며 기사들에게 나눠줄 땅과 재화를 유대인에게서 빼앗은 것이다. 결국 유대인들은 빈털터리로 쫓겨나고 말았다. 유대인들은 피난 지역으로 이슬람권을 가장 선호했다. 유대인들의 주류는 포르투갈을 거쳐 네덜란드에 자리 잡아 16~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31p​유대인들은 고향 에스파냐를 떠나면서 이를 갈았다. 알람브라 칙령은 세계 경제사에서 속으로 병든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의 융성이라는 두 가지 효과를 낳았다. 네덜란드의 번영은 또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일본이 재빠르게 서구 문물을 습득해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데도 기여했다. 32p​​​2. 에스파냐의 풍요와 밑 빠진 독​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이유​콜럼버스가 집요하게 서쪽으로 항해한 세 가지 이유는 새로운 땅을 발견한다는 모험정신,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전도 의지, 그리고 금에 대한 갈망이었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인 그를 가업인 직조업 대신 바다로 나서게 한 동인은 '지팡구의 황금'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상인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인 ;에 나오는 "중국 동쪽의 섬나라인 지팡구는 궁전의 벽마저도 황그으로 세울 만큼 금이 넘쳐난다"란느 구절에 사로잡혀 대항해를 갈망했다. 지팡구란 중국에서 일본을 부르던 이름의 하나였던 지펀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오늘날 일본의 영어 표기인 저팬 Japan도 여기서 나왔다. 우리나라의 영문 국명인 코리아도 마찬가지로 '꼬레아'라는 마르코 폴로 구술의 영어식 발음이다. 34p​콜럼버스의 항해 계획은 모두 거절당했으나 갑자기 이사벨 여왕에게서 후원하겠다는 전갈이 왔다. 이사벨 여왕이 그를 후원한 이유는 에스파냐의 팽창이라는 연장선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레콘키스타의 완성과 알람브라 칙령으로 기독교 세계의 주도권을 쥔 에스파냐의 입장에서 한발 앞서 바다에 나선 포르투갈을 견제하고 동양의 황금까지 얻을 수 있다면 투기적인 투자라도 아깝지 않다고 계산한 것이다. 37p​콜럼버스가 신대륙의 발견자로 남은 이유는 그로부터 시작된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에릭손이나 정화 함대의 이야기가 사실일지라도 세계사에 확인되지 않는 흔적만 남겼을 뿐 영향을 못 미쳤기에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흥미로운 대목은 콜럼버스는 신대륙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콜럼버스의 2차 항해에 동행했다는 설도 있는 베스푸치는 자신이 탐험한 땅이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이라는 확신으로 항해담을 엮어 ;라는 소책자를 1503년 펴냈다. 히트를 치면서 대륙의 이름이 아메리카로 굳어졌다. 피렌체 출신인 베스푸치가 올린 그의 이름 아메리쿠스 베스푸시우스에서 아메리쿠스를 따내고 다시 여성형인 아메리카로 바꿔 대륙의 이름이 정해진 것이다. 대지는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품고 생산하기 때문일까.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다른 대륙의 이름도 모두 여성형이다. 41p​아메리카 대륙의 수난과 약탈​에스파냐 젊은이들의 10분의 1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몰려들었다는 신대륙에서 구대륙 유럽으로 유입된 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유입이 시작된 1503년에서 1510년까지 금 4.9톤이 들어왔다. 1510년대의 유입량은 9.1톤, 1520년대는 4.9톤을 거쳐 절정에 달했던 1550년대에는 42.6톤이 유입됐다. 이후 금 유입량은 줄어들기 시작해 17세기 초반까지 연간 1~2톤으로 줄어들었다. 은 생산을 갈수록 늘어났다. 금과 은 광산에서 엄청나게 많은 인력이 소요됐고, 에스파냐는 인디오들을 압박해 강제노동으로 내몰았다. 42p​볼리비아에 위치한 포토시(Potosi) 은 광산은 산업혁명의 단초를 제공한 광산으로도 꼽힌다. 에스파냐를 넘어서 유럽 전역에 뿌려진 은이 돈 가치의 하락, 즉 물가상승을 낳고 이 과정에서 농민들과 소비자의 생활은 곤궁해졌지만 상인들은 더욱 부를 불렸다. 은 공급 증가, 물가 상승, 자본의 편중 심화라는 과정은 자본의 축적으로 이어지며 산업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그었다. 43p​에스파냐가 인디오의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었던 기반은 완벽한 군사적 우위에 기인한다. '아군 병력이 아무리 열세라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는 야만인이 사는 곳에 금과 은이 가득하다'라는 환상이 그동안 꺼려왔던 신대륙의 미개척 지역에 대한 도전을 부추긴 꼴이었다. 44p​발보아의 탐험대에는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끼어 있었다. 냉혈한이었던 피사로는 잉카제국의 황제까지 사로잡았다. 잉카의 황제는 목숨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4톤 가량의 금을 모아 그에게 안겨줬지만 그는 끝내 황제를 죽이고 잉카제국까지 멸망시켰다. 1519년 아스테카 문명을 멸망시킨 에르난 코르테스도 비슷한 경우다. 46p​금에 대한 갈증은 흑사평(페스트)의 확산과 농업 발달과도 관련이 있다. 쇠쟁기 등 농기구의 발달로 농업생산이 급증하자 인구가 늘어났다. 인구는 흑사병이 돌면서 격감했지만 사망자들이 남긴 재산은 많은 사람을 부유층으로 만들었다. 갑자기 돈이 생긴 사람들의 씀씀이가 커져 상업이 활발해지고 돈의 수요도 늘어났다. 돈이란 곧 금을 뜻하던 시절, 돈의 수요 증가가 금을 찾으려는 행렬을 낳았다. 자본가 계층이 농지를 사들여 자연스레 대형화가 이뤄진 농장에서 더 많은 식량이 생산돼 인구는 다시 늘고 십자군 전쟁 이후 지중해 국가들을 중심으로 무역과 상업이 발달해 가치 교환의 수단이자 자본 축적의 방편으로 금 수요가 급증, 결국은 신대륙 발견과 식민지 확보 경쟁으로 이어졌다. 47p​패권국가로 발돋움하게 한 '세기의 결혼'​기독교 왕국들이 이교도를 물리치고 탐험에 나서게 한 왕성한 추진력의 근원은 강력해진 국력이다. 1450년대까지만 해도 분열된 기독교 왕국들이 이슬람과 대치하면서도 서로 반목했던 에스파냐 지역에서는 불과 50여년 만에 국제정세를 능동적으로 바꾸는 기독교 왕국이 등장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통일 왕국이다... 왕권 강화에 저항하던 귀족들도 국내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프랑스의 왕 루이 11세도 포르투갈을 지원했으나 이사벨과 페르난도 2세 부부왕은 5년만에 전쟁에 승리, 공동 왕국의 기반을 다졌다. 결혼과 전쟁을 통해 다져진 카스티야와 아라곤 간의 물리적 화학적 결합은 신흥 강대국 에스파냐의 국가 성격을 기독교 해양 패권국가로 이끌어나갔다. 51p​정략결혼이 만든 초강대국​아라곤은 페르난도 2세가 단독으로, 카스티야는 공동 통치하던 두 사람은 비교적 좋은 부부 관계를 유지하며 공동 왕국도 결속력을 다해갔지만 1503년 이사벨 여왕의 사망으로 카스티야에 대한 통치권 논란이 일어났다. 이들의 딸 후아나 공주는 1496년 신성로마제국의 후계자인 필리프 대공과 결혼한 후 1500년 카스티야 왕국의 후계자로 정해지지만 남편의 바람기로 정신질환을 앓고 그의 아들 카를로스가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물론, 페르난도 2세가 넓혀 놓은 이탈리아 중남부 지역까지 에스파냐 왕국의 깃발이 나부꼈다. 에스파냐의 통일도 비로소 완벽하게 이뤄졌다. 52p​프랑스가 가장 무섭게 여겼던 에스파냐의 국왕은 이사벨과 페르난도 2세의 손자, 카를 5세였다. 카를 5세의 힘 역시 두 번에 걸친 에스파냐 지역에서의 세기의 결혼으로 인해 상속받은 영토에서 나왔다. 에스파냐의 왕이었을 때는 카를로스 1세로 대전이사,대전익스프레스,삼손익스프레스,대전사무실이사,대전포장이사,제주도이사,1660-2404 불리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직위를 겸임하게 된 뒤부터는 카를 5세로 불린 그가 상속받은 에스파냐는 전체 상속분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친할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의 오스트리아 땅 뿐만 아니라 외할아버지에게는 아라곤과 이탈리아 중남부를, 외할머니에게서는 카스티야를 각각 상속받은 카를 5세의 에스파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유럽의 최대 강국으로 자리를 굳혔다. 56p​​1574년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영역. 카를 5세의 에스파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유럽 최강국이 됐다. 그것은 '세기의 결혼'으로 인해 상속받은 영토에서 나왔다. 오스트리아, 부르고뉴 공국, 아라곤 왕국, 중남부 이탈리아, 카스티야 왕국 등 거대한 영토를 물려받았다. 중세 이후 근대까지 유럽의 최고 명문가인 합스부르크가의 기반도 이때 잡혔다. 55p​'밑 빠진 독' 에스파냐의 오만과 전쟁​에스파냐의 국제적 위상은 날로 높아질수록 경제는 속으로 멍들어갔다. 돈이 빠져나가는 가장 큰 구멍의 과시욕과 전쟁이었다. 1492년 이슬람의 그라나다 왕국을 완전히 내쫓기 직전에도 이사벨과 페르난도 2세 부부 국왕은 포르투갈,프랑스 연합 세력과 전쟁을 치렀다. 광활한 영토를 물려받은 카를 5세는 서구 세계에서 로마 교황 다음으로 정치적 권위를 인정받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노렸다. 선거로 뽑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차지하려는 그의 계획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에게 도전받았다. 에스파냐를 견제하기 위해 이교도인 오스만튀르크와 제휴할 만큼 반에스파냐 감정이 강했던 프랑수와 1세와 카를 5세가의 득표 경쟁에서 결국 카를 5세가 승리를 거뒀지만 그 승리는 돈으로 따낸 것이었다. 카를 5세는 돈 방석에 앉았지만 얼마 안 지나 모조리 빠져 나갔다. 무엇보다 동쪽의 위험, 오스만튀르크의 침공을 방어하는 데 돈이 필요했다. 카를 5세의 돈으로 합스부르크가는 1529년 오스만튀르크의 1차 빈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60p​수입은 많았지만 지출이 훨씬 큰 에스파냐의 재정 구조는 거대한 채무로 이어졌다. 재정 악화와 채무 증가는 필연적으로 세금 인상을 불렀다. 카를 5세가 친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부르고뉴 지역은 압정과 수탈에 항거해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장장 80년 세월(1568~1648) 동안 이어지며 에스파냐의 재정을 결정적으로 망가뜨렸다. 카를 5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 펠리페 2세도 오스만튀르크를 상대로 싸운 레판토 해전과 네덜란드 독립군과의 전쟁으로 채권자들에 대한 지불중단을 선언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도 무적함대를 상실하며 연간 총 세금 수입의 다섯 배에 달하는 비용을 바다 속에 처넣고 말았다. 요즘의 모라토리엄에 해당될 채무불이행 선언은 펠리페 2세 이후에도 반복됐다. 자연스레 에스파냐의 신용은 더욱 떨어지고 국가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평가를 내렸다. "카르 5세는 전사였으며 왕이었다. 펠리페 2세는 왕이기는 했다. 펠리페 3세와 펠리페 4세는 왕도 아니었고, 카를로스 2세는 인간도 아니었다." 64p​주체하지 못한 부와 쫓겨난 유대인​전쟁 뿐 아니라 높은 물가도 에스파냐를 괴롭혔다.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금과 은 때문에 통화량이 늘고 늘 전쟁 상태였기에 군인들에게 지급된 봉급으로 돈의 유통도 활발해진 반면 생산은 정체 내지는 감소한 탓이다. 당시 에스파냐 국내에서 소비되는 주요 물자 가운데 국내 생산으로 충당되는 비율은 10퍼센터 안팎에 불과했다. 물가 상승은 에스파냐의 인건비를 올려 외국인 노동자들을 불러들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주로 프랑스 노동자들이 피레네 산맥을 통해 넘어왔다. 에스파냐에게 신대륙의 금과 은은 축복이 아니라 차리리 저주였다. 국왕들은 금이 무한정 들어오는 줄 착각하고 군사비 지출을 늘리거나 거대한 궁전을 지었다. 물자가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소비 붐이 일어났다. 신대륙의 금은 16세기 중반 정점에 달했다가 1610년 이후 거짓말처럼 줄어들었다. 대신 들어온 은도 그 양이 1600년 경 최고치에 도달한 뒤 1630년부터는 급격한 하향 곡선을 그렸다. 66p​에스파냐에서 노동이란 기층민이나 이교도들이 담당하는 천한 행위였다. 이러한 편향적 노동 가치관과 제조업 붕괴의 시작은 바로 14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진 기술을 보유한 근면한 주민이었던 유대인과 무어족(에스파냐 이슬람 왕국의 주류 민족)을 박해하고 내쫓은 추방령에서 경제 기반이 무너졌던 것이다. 종교재판소로 상징되는 편견과 억압 구조 탓이다. 악명이 높았던 에스파냐 종교재판소는 유대인 추방 직후 이슬람교도들의 종교적 권리를 부인하고 개종 명령을 내렸다. 정교한 관개망을 운영하고 포도와 밀,쌀,설탕을 생산하던 무어인들을 내쫓고 모리코스인까지 추방한 에스파냐 종교재판소의 결정은 에스파냐 농업의 사실상 파산과 수입 급증을 야기했다. 68p​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운동으로 유럽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에스파냐가 온갖 전쟁마다 끼어든데에도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강박감이 깔려 있었다. 물론 종교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대제국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정치적 목적도 없지 않았다고 볼 수 있지만 에스파냐는 물론 포르투갈까지 포함하는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종교적 맹신은 두고두고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69p​​3. 종교적 갈등을 넘어선 유럽​프랑스를 등지게 만든 종교​앙리 4세, 그는 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프랑스의 국왕이다. 두 번 신교도였고 두 번 가톨릭교도였다는, 즉 신교와 구교 사이를 여러 차례 오갔지만 프랑스 역사를 통틀어 가장 존경받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그 이유는 종교 분쟁으로 분열될 것 같았던 프랑스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71p​프랑스는 경제난으로 신교 세력이 확대됐다. 프랑스 신교도들은 위그노 Huguenot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위그노의 어원은 '연합한 자' '동맹한 자'를 뜻하는 독일어 Eidgenosse로 위그노는 가톨릭교도에 비해 세력이 약해 신도 사이에 긴밀한 관계를 맺었는데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같이 쓰이던 스위스 제네바 지역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제네바의 신교 집단을 이끌던 지도자 장 칼뱅이 프랑스 출신이어서 위그노는 프랑스에 급속하게 퍼졌다. 더욱이 칼뱅이 주장했던 '정당한 방법에 의한 부의 축적 옹호'가 대 에스퍄냐 수출, 노동 송금으로 자본을 축적한 신흥 자본가층과 제조업자, 기술자는 물론 이들과 끈이 닿았던 귀족층까지 신교 세력권으로 끌어 당겼다. 73p​신교와 가톨릭 세력 사이의 크고 작은 싸움이 끊이지 않던 1572년 위그노 세력인 나바라 공국의 왕자와 가톨릭교도인 프랑스 공주의 결혼식이자 성 바돌로메 축일이 겹쳤던 8월 24일 학살이 벌어졌다. 가톨릭 세력은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모인 위그노 귀족 4000여 명을 학살했고, 종교적 광기는 프랑스 전국으로 번져 7만여 명의 위그노가 목숨을 잃었다. '성 바돌로메 축일의 학살'의 배후는 죽은 앙리 2세의 미망인이자 섭정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 모후로 그녀는 피렌체의 지배 가문이며 금융재벌인 메디치가 출신으로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조카였다. 가톨릭 세력의 학살을 피하기 위해 위그노 30만 명이 프랑스를 탈출해 네덜란드와 영국, 독일 지역으로 흩어졌다. 위그노의 탈출로 인해 프랑스의 인적 경쟁력도 당연히 약해졌다. 74p​피로 물든 결혼식의 당사자, 위그노 총각은 12년이 지난 1589년 후손이 끊긴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오늘날까지 프랑스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앙리 4세다. 끝없이 이어지는 내전 속에서 왕위 계승자로 지목된 앙리 4세는 신교도로 남아 있는 한 국왕으로서 프랑스를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 신앙의 옷을 가톨릭으로 갈아입었다. 위그노로 태어나 결혼식 직후 궁궐에 감금된 4년 동안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가 탈출에 성공해 고향인 나바라 공국에 돌아가 신교로 다시 개종한 뒤 왕위에 올라 정치적인 이유에서 가톨릭으로 또다시 개종한 것이다. 평생 동안 두 번 위그노였고 두 번 가톨릭교도가 된 앙리 4세는 결혼식에서의 학살을 잊지 않았지만 보복하지 않았다. 76p​이자도 갚기 힘든 경제 위기 속에서 앙리 4세는 두 가지 선택으로 난관을 뚫었다. '역대 최고의 재무장관'으로 꼽히는 쉴리를 등용해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 1598년 위그노에 대한 제도적 차별을 조건부로 폐지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해 국민화합을 꾀했다. 낭트칙령으로 30년에 걸친 위그노전쟁도 일단 멈췄다. 그러나 낭트칙령에 불만을 품은 광신도에 의해 앙리 4세가 암살되고 프랑스는 다시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손자 태양왕 루이 14세는 1685년 낭트칙령을 폐지해 또다시 파란을 불렀다. 낭트칙령이 폐지됐을 때 프랑스에 살던 위그노 100만 명 가운데 45만 명이 조국을 등졌다. 프랑스에서 두 차레에 걸쳐 일어난 위그노의 해외 대탈출은 에스파냐에서의 유대인 엑소더스와 함께 인적 자원의 국제 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43명 가운데 8명이 네덜란드 혹은 영국을 거치거나 직접 미국으로 건너간 위그노의 후손이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과 1,2차 세게대전에서 프랑스를 괴롭힌 독일제 무기들은 2차 위그노 망명에서 독일에 정착한 위그노 무기 길드의 후손들이 만든 것들이다. 스위스의 정밀공업도 마찬가지다. 자유를 찾아 스위스로 간 위그노 기술자들이 세운 시계공장에서 스위스의 정밀공업이 시작됐다. 78p​피로써 얻은 종교의 자유​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종파가 갈린 신성로마제국 내의 나라들이 갈등이 끓어오르며 종교전쟁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주 전쟁터였던 독일 지역이 쑥대밭이 되는 통에 '30년 전쟁 = 독일'이라고 각인돼 있지만 30년전쟁의 실상은 신성로마제국 내란으로 시작된 국제전이었다. 1526년부터 보헤미아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갖게 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2세가 1617년 보헤미아의 왕으로 즉위한 뒤 신교도 예배를 중지시키는 법률을 강제하자 불만을 품은 신교도 귀족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다. 30년전쟁은 에스파냐의 패배가 확실해진 1648년, '모든 군주는 자기 백성의 종교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는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로 끝났다. 독일 국토의 5분의 4가 황폐해지고 1600만 명이던 인구도 약탈과 학살, 기근과 역병 속에 600만 명으로 줄었다. 81p​30년전쟁을 마지막으로 유럽에서 신교든 구교든 가톨릭이든 기독교 사이에서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바친 이후에야 종교적 집착에서 다소나마 자유로워진 셈이다. 에스파냐가 장악했던 유럽의 패권이 가톨릭 형제국들을 배반하고 신교도 연합군에 선 프랑스로 넘어갔다. 가장 덕 본 나라는 독립국임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스위스와 네덜란드였다. 특히 네덜란드는 독일의 전쟁터에서 직접 싸우지 않았으나 가톨릭의 최강자인 에스파냐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는 점을 인정받아 도약을 향한 탄탄대로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얻었다. 82p​​​4. 사상 최고의 부자나라 네덜란드​탄압과 거친 환경을 이긴 원동력, 자유​네덜란드에서 미술이 발전한 이유는 사상적,종교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다.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1776년 펴낸 ;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덜란드는 영토가 작고 인구도 적지만 영국보다 훨씬 부유한 나라다. 네덜란드 정부는 연 2퍼센트에 돈을 빌릴 수 있다. 신용이 좋은 민간인도 금리 3퍼센트면 차입이 가능하다. 노동자의 임금도 영국보다 훨씬 높다." 네덜란드의 자유와 풍요는 자연과의 싸움, 압제에의 저항으로 거둔 성과다. 네덜란드가 유럽의 초강대국 에스파냐를 맞아 80년을 싸운 끝에 독립을 인정받은 저항의 역사는 더 처절하다. 독립전쟁은 부르고뉴 공국 당시부터 모직물 산업과 중계무역으로 번성했던 지역에 대한 에스파냐의 중과세에 항거하는 조세저항으로 시작했다. 반란에는 부르고뉴 남부 지방의 가톨릭교도까지 합세했다. 생활고 탓이다... 마침내 1609년 전황의 우세 속에 휴전조약을 맺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30년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국제조약)을 통해 독립국으로 인정 받았다.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은 자유의지의 소중함을 전파시켜 영국의 명예혁명(1608), 미국 독립전쟁(1775), 프랑스 대혁명(1789) 등 세계 3대 혁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거대한 제국이자 신대륙의 황금을 전비로 무한정 쏟아붇던 에스파냐를 맞아 네덜란드가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렘브란트 같은 대가들이 네덜란드에서 배출된 이유와 동일하다. 자유에 대한 열망과 근면에서 온 경제적 풍요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황금기를 열어간 것이다. 88p​빛의 화가 렘브란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면모가 있다. 대출로 망했다는 사실과 미술품 거래회사를 설립해 경매 방식을 확산시키려 애썼다는 점이다. 예술품을 일반 대중에의 경매시장에 내놓은 최초의 사례다. 자유로운 네덜란드 풍토였기에 가능했음직한 렘브란트의 경매 회사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영국으로 건너가 소더비와 크리스티 경매로 꽃피웠다. 87p​근면으로 일군 땅과 행운​네덜란드는 운도 좋았다. 15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유럽의 전반적인 물가상승에서 가장 큰 혜택을 얻었다. 주요 품목 가운데서도 가격이 가장 많이 오른 곡물을 안정적으로 생산한 덕분이다. 특히 에스파냐의 곡창 지대인 카스티야 지방에서 1506년 대흉작이 발생해 곡물 가격이 한 해 96퍼센트씩 뛰던 16세기 초반 네덜란드에는 돈이 밀려들어왔다. 곡물가격 상승의 혜택을 받게 된 것은 간척사업에 연유한다. 저지대와 간척으로 확보한 땅을 뒤엎고 있던 거대한 이탄층을 파내 태운 덕에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기름진 토양을 얻을 수 있었다. 간척 사업과 이탄의 존재는 운하망도 발전시켰다. 간척 대전이사,대전익스프레스,삼손익스프레스,대전사무실이사,대전포장이사,제주도이사,1660-2404 사업이 고가의 농작물과 공짜 에너지, 촘촘하고 정밀한 수송체계까지 선사한 것이다. 모든 것의 출발은 근면이었다. 90p​성장률 0.52퍼센트를 이룬 기적의 바탕​산업보다는 금융, 국내보다는 해외투자에 주력한 탓에 정점에서 하강한 17세기 후반 네덜란드의 해외투자는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에 가까운 약 15억 길더에 달했다. 네덜란드가 번영 가도를 달린 2세기 동안 연 성장률 추정치는 0.52퍼센트이다. 낮다고 느껴지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들의 성장이 더뎠기 때문이다. 근대 금융의 모든 것도 네덜란드에서 나왔다. 심지어 투기로 인한 대규모 불황까지 네덜란드가 가장 먼저 겪었다.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기에 네덜란드에는 사람이 모여들고 자유의지로 바다를 메웠다. 유대인들이 전혀 차별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술을 지녔거나 지식인인 경우에는 환영까지 받았다.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다. 금과 은이 많아야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믿어 귀금속의 유출을 엄격하게 규제했던 시대에 네덜란드는 금과 은의 자유로운 유통과 유출을 허용한 유일한 국가였다. 자본 이동의 자유화를 지금으로부터 4세기 전에 이미 실행했던 셈으로 이는 결국 네덜란드 금융을 살찌웠다. 93p​일본을 눈 뜨게 한 네덜란드​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수립한 에도막부는 1637년 기독교도들의 반란인 시마바라의 난을 겪은 직후인 1639년 일본인의 해외 진출도, 조선과 중국을 제외한 외국인의 입국도 금지했지만 유독 네덜란드데 대해서만큼은 관계를 유지했다. 네덜란드의 일본 진출은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직후부터 시작돼 1609년에는 나가사키 지역의 히라도에 상관을 개설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처음부터 실용주의적 사고 덕분에 막부의 호감을 샀다. 일본의 주요 수출품은 은으로 일본산 은은 애덤 스미스가 ;에서도 언급했듯이 네덜란드를 매개로 인도와 중국은 물론 유럽에도 퍼졌다. 반대로 일본에는 지식이 실려 들어왔다. 18세기에 일본어-네덜란드어 사전이 편찬되고 1792년 일본에서 제작된 세계지도는 오늘날의 것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정확했다. 일본이 개항 반세기 만에 유럽에서도 강대국으로 인정받던 러시아와 싸워 이길 수 있었던 초고속 성장의 비밀은 바로 네덜란드로부터의 학습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중반 네덜란드가 유럽에 수출한 일본산 도자기는 유럽 귀족 사회에서 일보에 대한 호기심과 일본 상품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도 네덜란드와 무역을 할 뻔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원으로 제주도에 표류했던 하멜의 보고서를 보고받아 당시로서는 대형선인 1000톤 급 '코레아호'까지 건조하며 조선과 직접 통상을 추진했으나 일본 막부의 반대 탓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본은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후추 등을 조선에 되팔아 수백 배의 폭리를 취해왔다는 점과 조선에 대한 독점적 무역업자로서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96p​​5. 유대인의 유랑과 부의 이동​떠나버린 기회, 네덜란드의 쇠퇴​불과 200만 명 남짓한 인구로 세계 경제를 주도하던 네덜란드는 18세기 들어 완연한 쇠퇴기로 주저앉았다. 풍요에 젖어 건강하고 근면한 노동정신이 엷어졌기 때문이다. 먼저 사회지도층부터 나태해졌다. 사회지도층이 기업가나 금융업자에서 금리생활자로 변하고 토지를 보유하는 토지 귀족화된 것이다. 제조업 약화는 결과라기보다는 쇠망의 원인이었다. 네로와 파트라셰가 등장하는 소설 ;의 무대인 플랑드르 지방의 쇠락이 대표적인 예이다. 99p​값싼 면직물을 만드는 단순한 하청기지였던 영국 맨체스터에서 기술혁신이 일어나 직물기계와 방적기계가 잇따라 발명된 끝에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일부 제조업에서 시작된 네덜란드의 경쟁력 저하는 전 부분으로 확산돼 조선업 같은 절대 우위 산업에서도 뒤처졌다. 정부는 정부대로 소비품에 높은 세금을 매겨 고임금 현상을 자초했다. 요즘도 네덜란드 주택들의 창문이 좁고 계단과 커튼이 짧은 것도 그 당시 창문의 폭과 계단의 층수, 커튼의 길이에까지 악착같이 세금을 매겼던 흔적이다. 영국 대신 프랑스로 대출 거래선을 돌린 것도 패착이었다. 특히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한 이후부터는 급속하게 국력이 약화되었다. 100p​우수한 인재들과 열정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것은 바로 영국이다. 영국의 명예혁명 이후 많은 네덜란드 지식인들과 레콘키스타 완성 후 알람브라 칙령으로 에스파냐에서 쫓겨나 포르투갈을 거쳐 네덜란드에서 터전을 잡았던 유대인들도 대거 영국으로 떠났다. 101p​영국의 발흥과 유대인​황금기가 끝나갈 무렵 네덜란드의 역동적 에너지는 명예혁명으로 영국 공동 국왕 자리에 오른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 빌렘 3세와 함께 이동했다. 혹시 모를 반대파에 대항하기 위한 1만4천명의 군사를 포함 3만명과 같이, 그리고 금융 전문가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233년 역사를 가지고 1995년 파산한 베어링 은행이 이들의 후예 가운데 하나다. 세계 최대 보험그룹의 하나인 포르티스 그룹에도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옮겨간 호프 금융가문의 흔적이 남아있다. '네덜란드 금융'이 영국에 미친 최초의 가시적인 결과물로 1694년 잉글랜드 은행이 태어났다. 윌리엄 3세가 세금을 거두지 않고도 전쟁비용을 충당할 수 있도록 영국의 자본가들은 잉글랜드 은행을 세우고 1609년 설립된 암스테르담 은행의 운영 방식을 모방, 영국 국왕들의 전통적인 단기자금 조달 방식도 네덜란드식 장기국채로 바뀌었다. 당시 발행된 국채 가운데 영국 국채인 콘솔 Console공채는 아직 런던 금융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 18세기 중엽 런던의 금리는 네덜란드와 비슷해졌다. 102p​영국의 유대인은 노르망디 공 윌리엄 1세가 영국을 정복한 1066년 노르만정복 당시 그의 직속 상인과 의사 자격으로 영국에 첫발을 디뎠다. 1290년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추방령이 내려져 4천~1만6천명의 유대인이 쫓겨난 것으로 추산된다. 명예혁명 전후 영국에 흘러든 유대인의 주류는 1492년 알람브라 칙령으로 에스파냐에서 쫓겨났던 사람들이었다. 포르투갈을 거쳐 네덜란드에서 번영을 맛보고 더 큰 기회를 찾아 이주한 것이다. 이런 경로를 밟은 선조를 둔 대표적인 유대인이 비교우위론으로 자유무역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1772~1823)다. 영국에서 국교도와 비국교도의 차별이 없어진 이후 유대인들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갔다. 소설가이자 정치가인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영국 수상 자리까지 꿰찼다. 개종했다지만 그의 성 Disraeli에서 앞뒤로 한 자씩 빼면 '이스라엘 Israel'이 될 정도로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던 사람이다. 네덜란드가 아니라 함부르크를 통해 영국으로 들어왔던 로스차일드가의 자금이 아니었다면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차지할 수도, 프랑스와 독일의 세력 팽창을 막을 수도, 인도의 지배권을 다질 수도 없었다. 108p​유대인의 유량과 부의 이동​1492년 알람브라 칙령으로 에스파냐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25만여 명 가운데 포르투갈을 택한 사람은 약 6만 명이었다. 유대인이 대거 떠난 것은 에스파냐에게 포드투갈이 합병당한 1580년 전후 시점이다. 나중에 포르투갈을 빠져나온 유대인들은 앞서 봤듯이 주로 네덜란드에 정착했다. 유대인들의 방향과 부의 이동 경로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미국 유대인의 주류는 에스파냐에서 가지가 갈라져 나간 네덜란드나 영국의 유대인과 달리 독일과 러시아, 동유럽의 박해를 피해 19세기 말 대규모 이주한 사람들이어서 이동의 동기와 경로가 같지는 않아도 박해를 받아 자유롭게 생각하고 믿으며 일하기 위해 이동해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스만튀르크는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지만 그것은 타종교에 관대한 이슬람교의 특성일 뿐 종교 제일주의는 마찬가지였다. 네덜란드나 영국, 미국 등은 모두 실용주의를 표방했다는 점에서도 에스파냐나 오스만튀르크와 차이가 있다. 109p​물론 오늘날 유대인의 모습은 예전과 다르다. 압제에 항거해 경제적 풍요와 종교의 자유를 갈망했던 1492년의 자신들의 처지를 이제는 오히려 다른 민족에게 강제하며 압박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110p​​​II 장 광기와 탐욕, 팽창과 거품의 시대1. 17~18세기 '버블 쓰리'​신대륙의 발견과 신항로 개척으로 이룬 상업혁명을 거치면서 축적된 자본은 산업혁명의 불씨를 지폈다. 경제가 급성장하는 구도 속에서 탐욕과 투기 같은 인간의 본성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16세기 이후 최초의 투기는 '자유와 기회의 땅, 네덜란드'에서 발생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주식시장과 거래소라는 시스템 아래 전국적으로, 계급과 계층을 막론하고 너나없이 뛰어들어 국민경제에 영향을 끼친 최초의 투기가 발생한 것이다. 114p​자본주의 최초의 버블, 튤립 투기​에스파냐 지배를 받던 네덜란드는 1568년 중과세에 대한 조세저항이 독립전쟁으로 발전해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을 통해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저지대 지역 가운데 가장 부유하고 주식거래소와 은행이 밀집해 있던 도시인 안트베르펜이 포함된 남부 지역이 1578년 에스파냐에 점령당한 뒤 암스테르담이 새로운 금융 중심지로 각광받으며 전문 인력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특히 종교적 박해를 피해 도망 온 유대인들과 위그노들이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들어와 금융업에 뛰어드는 가운데 토박이 네덜란드인들도 1609년 암스테르담 은행을 세우고 1610년에는 암스테르담에 새 증권거래소를 설립했다. 느슨한 연방 구조 아래 독립된 8개 주마다 은행이 세워졌다. 에스파냐로부터의 군사 위협이 사실상 사라지고 주로 독일 지역에서 벌어진 30년전쟁의 여파로 보헤미아와 체코 등의 직물산업이 붕괴돼 네덜란드 업자들은 독점 속에 호황 가도를 달렸다. 116p​투기의 대상은 신비의 꽃, 튤립이었다. 오스만튀르크의 이스탄불에 주재하던 네덜란드 외교관이 선물로 받은 튤립을 소개한 1550년 이후 튤립은 부호나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희귀종을 잘 키우면 돈이 되고 더욱 아름다운 변종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더 큰 돈을 벌 수 있게 되자 네덜란드 전역에 튤립 알뿌리(구근)확보 경쟁이 일어났다. 고가주였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주식을 사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근처에도 못 갔던 사람들을 '꿩 대신 닭'이라는 생각에 튤립 재배에 모든 것을 걸었다. 재배 인구가 늘어난 1620년대 중반부터는 모두가 돈을 벌었다. 튤립 투자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튤립 불패' 신화가 생기는 열풍 속에서 '영농 과학화'와 '금융 기법'이 가격 상승세에 기름을 부었다. 상품의 규격화는 튤립시장을 전천후 시장으로 만들었다. 튤립이 출하되거나 알뿌리가 열리는 계절이 아니라도 서류만 갖고도 거래가 성립됐다. 여기서 근대적 선물거래가 일어났다. 선물거래에 각종 조건을 붙이면 바로 옵션이 됐다. 오늘날 선물 옵션과 유사한 방식이 380여 년 전 네덜란드 튤립 거래에서 성행했던 것이다. 118p​언제까지 오를지 모를 불안감 속에서 오를 대로 오른 튤립 알뿌리의 가격이 한 번 꺽이자 공황심리가 시장을 지배해 이튿날부터 연일 폭락세를 기록하며 불과 4개월 사이에 95~99%나 빠졌다. 어음이 휴지조각이 되고 선물 계약을 맺었던 사람들은 줄행랑쳤다. 서민들이 집을 팔아 사들여 애써 키운 튤립 알뿌리는 땅속에서 썩어갔다. 가격이 끝없이 오르는 데 불안을 느끼면서도 '누가 나보다 비싼 값에 살 사람이 있겠지'라는 폭탄 돌리기 게임에서는 패자가 모든 것을 뒤집어 쓸 뿐 중간에 조금씩 이익을 본 사람은 웬만해서는 나오지 않는 법이다. 결국 투기가 막바지로 접어들던 1636년 11월을 기점으로 그 이전 계약을 모두 무효로 하고 그 이후에 맺어진 계약에 대해서는 투자자가 생산자에게 계약금액의 10%를 물어주는 방안에 모두가 합의했다. 간혹 큰 돈을 번 사람들이 없지 않았지만 재산을 감췄다. 해외로 빠져나가는 자금의 행선지는 스웨덴이나 영국이었다. 자본시장의 중심, 세계경제의 중심으로서 네덜란드는 이전과 같은 명성을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122p​네덜란드에서 일어났던 자본주의 최초의 거품은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넜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1720년을 전후로 버블이 발생한 것이다. 123p​남해회사 버블과 잉글랜드 은행​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태어난 윌리엄 핍스라는 선장이 1만 퍼센트 배당률이라는 드라마를 만들어낸 주역이다. 식민지 태생의 평민이 보물을 건지고 국왕에게서도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 잘하면 1만 퍼센트의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소식은 온 나라를 들뜨게 만들었다. 주식회사 설립 붐에 또 하나의 대형 사건이 터졌다. 1694년 잉글랜드 은행이 설립된 것이다.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다는 허가증이 투자 포인트였다. 잉글랜드 은행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느라 돈이 부족했던 데다 통화의 품질, 즉 금화와 은화의 순도를 높이는 화폐개혁이 맞물려 경제난이 찾아온 탓이다. 주가가 떨어지고 주식회사들의 줄도산이 이어지며 수많은 보물인양 회사들도 이때 사라졌다. 대표적인 우량주였던 동인도회사 주가도 200파운드에서 37파운드로 떨어졌다. 128p​남해회사의 루머와 조작, 로비가 만든 '남해회사 주식을 못가지면 바보, 해마다 몇 백 퍼센트씩 배당을 받을 수 있는 주식'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관심은 열풍을 넘어 광기로 치달았다. 결국 모든 것이 드러나고 이 사건을 조사한 정부 공식 문서에 최초로 '버블'이라는 용어가 사용됐다. 과학자에서 공무원으로 변신해 요즘으로 치면 차관급인 런던 조폐국장을 지내던 뉴턴은 하때 평가이익 7000파운드를 올리기도 했지만 끝내 2만 파운드를 날렸다. 요즘 가지초 20억원을 잃은 뉴턴은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알 수가 대전이사,대전익스프레스,삼손익스프레스,대전사무실이사,대전포장이사,제주도이사,1660-2404 없다"고 한탄했다. 134p​미시시피 버블과 무너진 프랑스의 꿈​최고의 재무장관 쉴리 이후 프랑스의 또 한 명의 유능한 재무 관료 콜베르는 중상주의자로서 국고에 금과 은을 쌓고자 산업을 일궜다. 콜베르는 위그노를 탄압하면서도 무역과 해운업, 조선업에 종사하는 위그노들에게 대해서만큼은 차별을 두지 않았다. 덕분에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가 많으며 강한 나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콜베르가 1683년 사망하고 1685년 루이 14세가 위그노에 대한 차별을 조건부로 없앤 낭트칙령을 폐지하면서 모든 게 엉망으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더욱이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짓는 등 사치와 전쟁에 돈을 쓰면서 재정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136p​국가 파산 위기에 직면한 프랑스는 채무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로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1716년 은행 설립과 지폐 발행을 허용했다. 로가 설립한 프랑스 최초의 은행, 방크 제너랄이 발행한 지폐는 초기에 대 성공을 거두었다. 외국인 죄수 출신인 그는 재무총감 자리와 공작 작위까지 따냈다. 문제는 준비자산도 없이 주식 물량을 너무 많이 공급하고 덩달아 불환 지폐까지 남발했다는 데서 왔다. 배당할 재원이 없으면 회사들을 합병하고, 더 많은 은행권을 발행하는 구도 속에 4년 새 통화량이 4배로 뛰자 물가는 더욱 급격한 상승 곡선을 그렸다. 결국 1720년 인플레이션에 시달린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자 로는 재무총감에서 물러났고, 로 이후 프랑스에서 역대 재무총감들이 세금제도를 개혁해 재정난을 피하려고 했지만 귀족층에 의해 번번이 무산되며 계급 계층간 위화감이 깊어지고 결국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졌다. 140p​로의 실험이 안긴 후유증은 오늘날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프랑스에는 은행인데도 '방크 bank'라는 이름의 은행이 거의 없다. '쏘시에테(회사)'나 '그레디(신용)'가 은행 이름으로 대신 쓰인다. '방크'로 불리는 곳은 십중팔구 외국계다. 200여 년 전의 쓰라린 기억이 '은행'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굳어진 것이다. 서유럽에서 금을 가장 선호하는 나라도 프랑스다. 140p​좋은 돈과 나쁜 돈​로가 찍어낸 지폐는 200년을 앞선 발상이었지만 프랑스를 파탄 지경으로 몰고간 나쁜 돈이었다. 나쁜 돈이란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돈을 말한다. 돈의 가치가 하락하면 물가가 올라 서민들이 살기가 어려워진다. 반대로 좋은 돈은 가치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돈이다. 돈의 가치가 급하게 올라도 경제는 악영향을 받는다. 생산과 공급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142p​가치가 없는 화폐의 대명사로 미국 독립전쟁을 전후해 각 주가 필요할 때마다 발행해 가치가 없는 콘티넨털 Continental이나, 프랑스 혁명기 몰수한 교회의 재산을 담보로 발행한 채권이 지폐로 변한 아시냐 Assignat가 손꼽힌다. 영국은 미국이나 프랑스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 화폐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영국은 금화를 조금씩 깍아내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1661년부터 금이나 은으로 만드는 동전의 일부에 오톨도톨한 테두리를 집어 넣었다. 돈의 품질에 대한 신뢰는 상품 매매와 유통을 촉진시키고 신용경제의 싹을 틔웠다. 145p​​노예무역선에 노예를 화물을 적재하듯 태운 모습. 173p​2. 대항해와 금을 향한 행진곡​700년 만에 다시 등장한 금화​유럽인들로 하여금 바다로 나가게 만든 동력은 돈이었다. 아프리카 북동부에서 나는 사금을 획득하고 잘하면 후추 같은 향신료까지 구해 한몫 잡을 수 있다는 욕망이 그들을 거친 바다로 내몰았다... 에스파냐가 카나리아 제도를 차지한 이유는 포르투갈과 벌인 전쟁의 소산이다. 당시까지는 이슬람 왕국에 대한 재정복 사업에 열중해야 했던 에스파냐가 같은 기독교 국가인 포르투갈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이유는 경쟁심 때문이었다. 그 경쟁심의 한복판에 바로 금화가 있었다. 148p​포르투칼의 금을 향한 갈망​번영하던 무역도시이자 이슬람 해적의 기항지였던 세우타는 포루트갈 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시내에서 극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상륙 8일만에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완전히 점령했다. 유럽 국가가 바다를 건너서 다른 대륙을 무력으로 제압한 첫 번째 사례인 포르투갈의 세우타 점령은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진 식민지 건설과 제국주의 침략의 첫 단추였다. 149p​1460년 엔히크 왕자가 사망할 즈음 포르투갈 배들은 적도를 지났다. 남진을 계속하던 포르투갈은 1488년 아프리카 남단에서 희망봉을 발견했다. 아프리카 서쪽 해안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도로 가는 뱃길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도 알아차렸다. 결국 1498년 5월 바스코 다 가마는 배를 이용한 서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인도 땅을 밟았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훗날 ;에서 이들의 항해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더불어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두 가지 중 하나"라고 꼽았다. 인도 직항로 발견으로 '서구가 지배하는 세계무역' 시대가 열렸다. 후추 같은 향신료뿐만 아니라 인도산 면이 옷감이라고는 모직물 위주에 값비싼 비단 정도였던 유럽의 의류시장에 대량 보급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한 나라가 바로 영국이다. 단순 수입에 머물지 않고 수입 대체를 위해 흉내 내기 시작한 것이 면직 산업의 기계화와 동력화를 낳고 종국에는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156p​약탈한 황금의 약탈 전쟁​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도 바다에 서둘러 나섰다. 최대한 많이 상대방 즉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기득권에 끼어들되 돈은 최소한으로 들어야 하며 게다가 교황에게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킬 수단은 '작지만 강력한 해군'이었다. 진출할 곳은 마땅치 않았다. 더욱이 로마 교황이 대서양 한복판을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에게, 서쪽은 에스파탸에게 우선권을 준다는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까지 인정한 상태였다. 모두 에스파냐어를 사용하는 라틴아메리카 국가 가운데 유독 브라질만이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쓰는 이유도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발견하기도 전에 맺어진 토르데시아스 조약의 산물이다. 그러나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경제를 나누는 종착점이 아니라 본격적인 경쟁을 알리는 예고탄이었다. 158p​국가로부터 공인받은 해적인 사략선 privateer 시대가 이렇게 열렸다. 정부가 국가 예산을 들여야 할 해상 전쟁 업무를 민간에게 위탁한 셈이다. 플랑드르 지역의 상인과 자본가, 귀족들의 연합체가 국가로 발전한 것이 네덜란드다. 어느 국가보다 선박은 물론 유능한 선원이 많았던 네덜란드조차 사략선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프랑스 해적의 특징은 위그노 출신이 많았다는 점이다. 1523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프랑스 위그노 해적들은 본국은 물론 신대륙의 플로리다 동부 해안에 대규모 요새를 세우고 서인도제도를 오가는 에스파냐 보물선을 괴롭혔다. 견디다 못한 에스파냐가 위그노들의 플로리다 요새를 점령하자 위그노 해적들은 쿠바와 히스파니올라 섬으로 도망쳤고 원주민으로부터 '버칸 buccan'으로 불렸다. 에스파냐가 토벌에 나서자 이들은 다시 바다로 나갔고 사략선 행위가 금지되고 나서도 한참 뒤인 19세기까지 대서양에서 악명을 떨치던 해적을 통칭하는 '버키니어 buccaneer' 집단이 이렇게 태어났다. 영화 시리즈도 이들 버키니어가 소재다. 160p​프랑스 국왕들의 묵인 정책 아래 위그노 해적들은 해변가에 거대한 성과 멋진 주택을 짓고 그들만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오늘날 관광객들을 끌어당기는 생말로의 아름다움은 위그노 해적의 칼과 에스파냐 선원들의 피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금은보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162p​국가의 지원을 받은 해적의 대명사로 꼽히는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마젤란에 이어 두 번째로 세계일주 항해를 성공한 모험가이다. 그는 해군 제독에 임명돼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물리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지만 본질은 해적이었다. 영국인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도 해적질의 연장선이었던 셈이다. 162p​영국 함대의 분견대 6척이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선박인 포르투갈의 1600톤 급 갤리온선 '마드레 데 디오스'를 나포하면서 이 배에 가득 실린 향신료 규모에 놀라고 가치를 깨닫자 영국은 직접 동방 항로 개척에 나서기로 작심하고 1600년 동인도회사를 세웠다. 동인도회사라는 도매상이 독점상인으로 자리잡고 자본주의의 꽃을 피우기까지는 사상 최대의 해상 약탈로부터 150여 년이 채 안 걸렸다. 165p​크롬웰의 공화정과 찰스 2세, 네덜란드 출신의 윌리엄 3세로 통치권이 이어지면서 영국은 보다 적극적으로 해양 경쟁에 뛰어들었다. 국력의 신장과 정규 해군의 성장으로 사략 행위에 더 이상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 영국은 18세기 들어 정책을 일대 전환, 사략 행위를 엄금했지만 해적은 줄어들지 않았다. 167p​미국 독립전쟁 때에는 수많은 미국인 사략선장들이 영국 해군에 맞서 '애국적인 해적 행위'를 벌였다. 프랑스 위그노 해적의 후손들이 주류였던 카리브해 버키니어들도 프랑스의 숙적으로 변한 영국에 맞서 19세기 말까지 해적으로서 악명을 떨쳤다. 169p​사업의 분야만 바꿨을 뿐 19세기 말까지 해적은 여전히 영화를 누렸다. '또 다른 노획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350년 동안 유럽과 미국을 살찌운 삼각무역도 보물선이 아니라 '흑인노예와 노예선' 때문에 번창했다. 황금에 대한 관심과 경쟁으로 생성된 약탈이라는 광기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또 다른 광기와 압제를 낳아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잡혀와 노예로 팔려나갔다. 노예무역은 다른 어떤 사업보다 수지맞고 안정적인 사업이었다. 서유럽의 기준으로 '해상 약탈에 비하면 훨씬 인도적인 사업'이기도 했다. 169p​아프리카의 비극, 노예사냥과 삼각무역​로마제국 절정기에는 도시 로마에 2만 시민을 먹여 살리는 노예가 40만 명이 있었으나 모두 백인이었다. 서구 사회에 흑인이 노예로 등장한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집트 원정과 로마가 카르타고와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치르는 동안 문물이 교류되는 과정에서 들어온 정도다. 흑인 노예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포르투갈이 대항해 시대를 연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포르투갈인들은 1444년 처음으로 라고스(지금의 나이지리아 수도)에 아프리카 노예시장을 열고 본격적으로 노예장사에 나섰다. 노예장사에서 얻은 수익은 포르투갈의 탐험 비용으로 쓰였다. 에스파냐가 서인도제도와 라틴아메리카에 건설한 요새와 광산 부근의 원주민, 즉 인디오들이 가혹한 노동 환경과 백인들이 갖고 온 질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통에 노동 인력이 급감하자 대체 인력이 필요했다. 유럽인들에게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다. 175p​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하인 신분이었던 흑인들이 노예로 전락한 이유는 호황 때문이었다. 담배로 인한 북아메리카 최초의 경제호황이 장기 노동력 확보가 더 이익이라는 판단을 낳고 흑인의 노예화를 불렀다. 흑인 노예도 급증해 독립전쟁 직전 흑인은 남부 인구의 3분의 1에 이르렀다. 미국의 초기 경제는 담배와 면화를 매개로 한 돈에 대한 백인의 탐욕 속에서 흑인 노예의 피와 땀으로 성장한 셈이다. 176p​삼각무역 triangular trade 이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유럽을 연결했던 무역을 말한다. 대항해 시대가 열린 15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수백 년 동안 유럽과 미국을 먹여 살린 거대한 무역망이기도 하다. 인류의 역사로 따진다면 삼각무역처럼 장기간에 걸쳐 동일한 경유지를 통해 그토록 거대한 수익을 안정적으로 찿출한 무역시스템도 찾아보기 어렵다. 177p​삼각무역 1단계는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향해 노예상인들이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 도착해 추장이나 족장, 현지 상인들에게 면제품과 구슬, 소총, 술 등을 흑인 노예와 바꿨다. 2단계는 아프리카에서 신대륙으로의 항로다. 흑인 노예를 가득 실은 유럽의 선박이 서인도제도와 영국의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 브라질에서 생산되는 사탕수수나 당밀, 담배와 면화, 커피와 노예를 교환했다. 3단계는 아메리카에서 다시 유럽으로 향한다. 유럽에서 막 일기 시작한 설탕과 커피, 초콜릿, 담배에 대한 수요 급증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거쳐 돌아온 선주의 이익을 극대화시켜줬다. 미국의 옥수수, 당밀 농장과 주류업도 삼각무역 체제 아래 운임 절감이라는 당면 목표가 없었다면 발전할 수 없었다. 옥수수를 액화시키는 것이 알곡 그대로 판매하는 것보다 같은 선박 운임으로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기에 농업은 물론 주류업까지 발전한 것이다. 178p​물론 억압된 운명에 거부하는 흑인 노예들도 적지 않았다. 흑인 지도자 루베르튀르의 군대는 혼란을 틈타 침공한 영국군과 섬의 반쪽을 차지하던 에스파냐까지 몰아냈다. 프랑스는 이 공로를 인정해 그에게 프랑스 육군 소장 게급장까지 달아줬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은 뒤 사정이 달라졌다. 그의 흑인 군대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1804년 역사상 최초의 흑인 독립 공화국인 아이티를 세웠다. 흑인들의 영광은 여기에서 그쳤다. 자원과 지역 패권을 노린 외세와 내부의 부패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미국의 경제 지원이 끊길 때마다 경제난과 쿠데타가 반복되는 아이티의 현실은 15세기부터 시작된 흑인 수탈사가 현재진행형임을 말해주는 상징으로도 꼽힌다. 180p​약탈과 무역에서 싹튼 금융산업​황금을 향한 욕심에서 출발해 바다 개척과 식민지 확보, 해상 약탈과 무역으로 이어지는 광기의 여정은 금융에 도달했다. 이전까지는 거대한 회사를 세우려면 국가나 국왕의 특별한 승인을 얻는 게 상례였지만 바닷길이 열리면서 자생적인 금융시장과 금융회사들이 생겨났다. 영국에서 자생적인 금융회사가 생긴 토양은 물류와 대화 대전이사,대전익스프레스,삼손익스프레스,대전사무실이사,대전포장이사,제주도이사,1660-2404 공간이었다. 노예무역과 삼각무역, 식민지 개척으로 물동량이 많아진 가운데 막 유행하기 시작한 커피가 금융시장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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